나는 한란입니다

새해 1월 초, 사경회 기간 접수처에서 안내를 하고 있는데 한 청년이 다소 의외인 듯 , 전도사님도 흰 머리가 있네요?”라면서 말을 건넨다. “, . 저 보기보다 흰머리 많아요. 나이는 속일수가 없잖아요.”라며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언젠 부터인가 문득 거울을 보다가 탄력 없는 피부와 흰머리를 보면서 언제 이렇게 나이를 먹었지!’라면서 서글픈 마음이 살짝 들었는데, 그 말을 듣는 순간 우연히 본 모회사의 광고 카피가 떠올랐다.

나는 한란입니다. 한 겨울에도 나는 피어나고 피어납니다. 나는 추워질수록 단단한 힘을 냅니다. 나이 들 틈 없는 초밀도 동안 피부.” 혹한에도 꽃을 피우는 제주한란의 생명력으로 초밀도 동안 피부를 완성한다는 모회사의 화장품 광고였다. 설한 속에서 가느다란 잎과 자주 빛의 꽃을 하늘거리며 나는 한란입니다.”라는 내레이션이 무척이나 인상 깊게 남아 있었다.

꽃말이 귀부인, 미인인 제주 한란(寒蘭, Smoothlip Cymbidium)은 우리나라에서 오직 한라산에서만 볼 수 있는 매우 희귀한 식물이다. 한란은 추위 속에서 피는 난이라 하여 한란(寒蘭)이라고 한다. 보통 꽃이 피는 시기가 12~1월로 추운 겨울에 꽃이 핀다. 한란은 난 중 가장 비싼 난이지만, 화려하지도 요란하지도 않다. 사시사철 푸른 꼿꼿한 잎과 소박하면서도 청조하고 우아한 꽃이 매우 아름답다. 맑고 깨끗한 향이 그윽하여 청향(淸香)이라고 불린다. 빛깔, 잎 모양, 향기가 완벽한 조화미를 이루어 난()중의 난이라 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남획으로 인하여 멸종위기에 처해 식물 종 자체를 천연기념물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식물로는 한란이 유일하다.

 

미인만 될 수 있다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하신 눈, , , , 종아리 할 것 없이 전신에 칼을 대도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이 시대. 주름을 없애고 탄력 있는 동안 피부만 유지할 수 있다면, 자연스럽게 웃고 웃을 수 없는 인공미인으로 살아가도 아무런 거리낌 없는 시대가 되었다.

낡아 썩어 없어진 겉사람에 연연해하며 조금만 초라해보여도 우울해하거나 속상해하거나 애달파하면서도, 정작 속사람은 힘없는 파파할머니가 되어도 좀처럼 울지 않고 있다. 겉만 그럴싸하게 포장한 인공미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거세고 강한 환난의 바람이 싫어 숨어버리고, 내면의 미()을 가꾸는 일에는 너무나 소홀하다. 혹한 설한 속에서 피어난 한란의 꿋꿋함과 강한 인내력이 부러워지는 것은 그 때문이리라.

추운 겨울, 얼굴과 손이 부르트지 않도록 로션을 찍어 바른들 영혼에 그 무엇이 유익하랴. 혹한 추위 속에서 땀 흘리고 수고한 투박한 손과 부르튼 입술이 더 귀하다. 화장기 없는 순결한 맨얼굴이 더 아름답다.

미스터 코리아 안중근, 와이 투 코리아! 미스 코리아 춘향이, 다 좋은데 그 귀걸이는 너무 비싸!” 광인이라고 불리어도 좋다. 투박한 막대기 같은 검붉은 발이어도 좋다. 누더기를 기어 입은 듯 거지같은 몰골이어도 좋다. “눈이 오고 얼음이 녹아도 걱정 없습니다. 안심하세요.” 그 한마디가 도리어 두꺼운 외투를 걸치고 좋은 신발을 신은 이들을 부끄럽게 한다. 맨발의 천사(1920-2001), 최춘선 할아버지의 갈라진 투박한 발과 초췌한 몰골이 더욱 빛이 난다.

가난한 이들을 섬기며 돌보느라 허리는 활처럼 휘어지고, 손의 지문도 닳아 없어졌다. 로션은 물론이거니와 그 흔한 세숫비누 한 번 사용하지 않으셨다. 깊게 패인 주름이 손과 얼굴에 자글자글하셨던 마더 데레사(1910-1997). 그러나 그 얼굴은 그 누구보다도 눈부셨다. 손과 얼굴에 패인 주름은 하나님과 이웃을 향한 깊고 깊은 사랑의 골이기에.

난장이, 절름발이, 꼽추, 장님, 추녀였지만 몸보다 영혼이 더 중요함을 알았던 마르가리타(1287-1320). 그녀는 부모에게 버림받고 창문 하나 없는 작은 독방에 갇혀 살았지만 실망하지 않았다.

신부님, 오늘 아침에 부모님이 저를 이곳으로 데리고 왔을 때, 왜 하나님께서 저를 이곳으로 오게 했는지 그 이유를 이해하지 못했어요. 그러나 지금 하나님께서 제게 그것을 분명하게 알려 주셨어요. 예수님이 당신의 제자들로부터 부인당한 것처럼, 하나님께서는 제가 주님을 좀 더 가까이 따를 수 있도록 똑같이 취급당하도록 하고 계신 거예요. 그런데 저는 하나님께로 가까일 갈 만큼 착하지가 않아요.” 고운 풍채도 없고 아무 흠모할 것도 없는 예수님을 닮은 그녀. 그 어떤 혹한 환난의 고초를 겪어도 피어나고 또 피어났다. 예수님의 피 묻은 자주 빛의 옷을 걸쳐 입고서.

이들은 모두가 난 중의 가장 탁월한 한란처럼,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한 하늘나라 최고의 선남선녀들이었다. 옛 선조들은 난이 자라나는 고장은 아름답지 않을 수 없다고 하였다. 예수님을 닮은 하늘나라의 미인들. 그들이 지나간 자리는 아름답다. 소박하지만 맑고 깨끗한 순결한 향이 진동을 한다. 겉 사람인 육체는 별로 중요하지가 않다. 그것은 멀지 않아 부서져 먼지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중요한 것은 속사람이다. 예수님을 사랑하면 아무 것도 꺼릴 게 없다. 그 어떤 모습도 초라할 게 없다. 추운 겨울 로션을 바르지 않아 하얀 부스러기가 일어나도 부끄럽지 않다. 유행에 동떨어진 낡고 초라한 옷이어도 창피하지 않다. 추운 겨울 맨발로 다니며 사람들에게 웃음거리와 비방거리가 되어도 마음이 평화롭다.

가시덤불을 품어 안고 자라나지 않으면 난이 아니다”(孔子家語)라는 말이 있다. 아름다운 귀부인으로, 어린양의 아내(21:2)로 거듭나기 위해서는 가시덤불을 품어야 한다. 한란이 혹한 겨울에 피어나듯 환난의 바람과 맞서 싸워야 한다. 어떠한 고통과 쓰라림과 고통 속에서도 나는 한란입니다. 한 겨울에도 나는 피어나고 피어납니다. 나는 추워질수록 단단한 힘을 냅니다.”라는 고백을 드릴 수 있어야 한다.

한란이 추우면 추울수록 단단한 힘을 내듯 환난의 바람이 강하면 강할수록 영혼은 더욱더 견고해진다. 여전히 환난의 바람 앞에서 두려워 떨 수밖에 없는 연약한 존재이지만, 모든 환난을 이겨내고 거룩한 꽃을 피우기까지 끝까지 참고 인내해야 한다. 혹한 속에서 피어난 심비, 한란의 강인한 생명력처럼 영혼의 심비에 예수님의 생명이 새겨지는 그날까지 영혼의 절개를 지키며 전진해야 한다. 멸종위기에 처한 희귀한 한란처럼, 땅의 복을 추구하며 연단의 복음이 점점 사라져 가고 있는 이 시대에 기개 높은 한란처럼 십자가의 복음을 꼿꼿이 세워야 한다.

전무후무한 대환난의 바람이 불어 닥치기 전에 예수님 맞을 준비를 어서 속히 해야겠다. 엄살 그만 피우고 환난의 바람을 지나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겠다. 환난의 바람이여, 불어라. 그곳에 예수님의 진한 향기 진동하리라. 나 그곳에 우뚝 서리라.

이지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