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기독교교육의 기초를 놓고 많은 목회자와 학자, 교사들을 길러낸 최초의 여성 주선애 교수. 교회교육과 교사 훈련의 개념조차 전무하던 시절에 주일학교 교사강습회를 최초로 시작해서 한국 교회에 교사강습회 운동을 일으킨 교회교육의 선구자다. 또한 30 중반에 여전도회 전국연합회 회장으로 많은 활동을 한국 교회 대표적인 여성 지도자로서, 교회 여성들의 역할 증대에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지금은 탈북자 지원 사역에 매진하면서 탈북자들의 정착과 적응을 돕고 있다. 일생 주님의 손에 붙들려 걸음, 걸음 달려온 섬김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고자 한다.

스물 아버지의 유언

1926 장맛비가 장대같이 쏟아져 내리는 7, 황해도 구미포에 21 앳된 여인이 허허벌판을 가쁘게 달리고 있었다. 평양에서 황해도 장연까지 기차를 타고 왔지만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기차역에 내려서도 30,40 길을 혼자 걸어가야 했다. 이따금 지나가는 행인에게 길을 물어가며 허겁지겁 달려갔다.

폐결핵으로 황해도 시골에서 요양 중인 남편이 사경을 헤매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떠나온 터였다. 시라도 빨리 가지 않으면 마지막 숨을 혼자 거둘지도 모른다. 눈물이 흘러 빗길을 걷는 발걸음을 더욱 힘들게 했다. 이제 18개월 어린 딸은 우산 사이로 빗물이 흘러들어 때마다 빗물을 먹으며 엄마 등에 달라붙어 있었다. 어느 농가 사랑채 작은 방에 남편은 창백한 얼굴로 혼자 누워 있었다. 깡마른 얼굴에 지그시 눈을 남편은 아내와 딸을 다시 있어서인지 안도의 숨을 내쉬는 보였다. 힘없는 웃음을 띠며 마디를 던지고는 다시 지그시 눈을 감았다. “잘 왔소.

한참 말이 없었다. 아내의 울음이 서서히 멎을 때쯤 띄엄띄엄 들리지 않는 목소리로 부모님의 안부를 물었다. 또다시 침묵이 흐른 급기야 마지막 유언을 남기려는 약간 긴장된 자세를 취하면서 띄엄띄엄 말을 했다.

“이 세상은 잠깐이오. 내가 죽더라도 다른 생각은 하지 말고, 선애를 키워주오. 부탁하는데 선애는 딸이지만 기독교 선생이 되도록 길러주오.

아버지는 겨우겨우 말을 맺으셨다. 마지막 숨을 쉬고 아버지는 하늘나라로 떠나셨다. 마지막 이별을 앞에 두고 어머니는 가슴을 부여잡고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어머니는 유언을 가슴에 품은 70 년간 홀로 사셨다. 재산이 있는 것도 아니었고 혼자 살아갈 만한 능력이나 경험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해야 딸을 ‘기독교 선생’으로 만들 있는지 알지도 못했다. 의논해 곳도 없었고 가르쳐줄 만한 사람도 어머니 주변에는 없었다.

창백한 얼굴과 가느다란 목소리로 남긴 마디 유언을, 어머니는 일생을 통해 이루어 나가셨다. 어머니는 남편에게 다한 사랑과 남편의 유언에 “예!”라고 대답하지 못하고 울어버린 것이 일평생 한이 되어 ‘내 기어코 당신의 뜻을 몸으로 이루리라.’고 수없이 되뇌며 살아오셨다. 97세까지 어머니의 삶은 넉넉한 “예.”라는 대답이 되었다.

기독교 4

증조할아버지의 기독교 개종에 따라 할아버지 3형제는 모두 기독교인이 되었다. 그래서 우리 집안은 모두가 기독교인이다. 나의 할아버지 주인섭은 삼형제 맏아들로서 아들만 오형제를 낳아 키우셨다. 그러나 아들 다섯이 20 전후로 하나하나 폐결핵으로 세상을 떠났다. 당시 폐결핵은 거의 불치병으로 여겨졌기 때문에 그저 좋은 공기와 좋은 곳에 있는 것으로만 치료될 있다고 믿었다. 그렇게 아들 오형제를 모두 먼저 천국으로 보내셨다.

주일학교 교사를 하셨던 나의 아버지 주기남은 넷째 아들이었다. 아버지는 고향인 평남 대동군에 있는 추빈리교회에서 일찍부터 주일학교 교사를 했다. 그때 같은 교회 교인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아버지는 주일학교 교사를 아주 열심히 했던 청년이었다. 주변에 있던 꽃을 꺾어 아동 설교를 하는 특이한 방법을 가며 가르쳤다고 했다. 아버지에 관한 사진이나 기록은 어떤 것도 찾을 없었다. 그러나 아버지의 고귀한 신앙적 유언은 어머니의 일평생을 지배했다. 놀랍게도 아버지의 유언은 예언처럼 이루어졌다. 내가 신학교에서 일생을 섬길 있었던 것은 아버지의 기도와 나를 일관된 축복의 길로 인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외할머니

어머니의 고향은 평양에서 30 떨어진 평안남도 중화군 당전면 동산리다. 평양역에서 남쪽으로 가는 열차에 오르면 대동강역을 지나 역포역이 나온다. 역에서 내려 10 정도 서쪽 논밭 길을 걸어가면 작은 언덕 너머에 시골 마을이 있다. 20 되는 농가 마을이다.

이곳은 오는 날이나 얼음이 녹을 때면 새빨간 흙이 차져서 걷기가 무척 힘든 곳이다. 빨간 진흙이 신발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는 고장이다. 변씨 집안과 유씨 집안이 섞여 사는 자그마한 농촌 마을이다. 주로 기독교 가정들로 화목하게 지내고 있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대부분 부자는 아니더라도 토지가 비옥해서 먹고 사는 걱정 없이 사는 마을이었다. 도시에서 자란 나는 외할머니 댁에 때면 어머니에게 이런저런 질문을 많이 하곤 했다. 쌓인 사이로 보리가 파릇파릇 나온 것을 보고 풀이 돋았다며 눈밭을 좋아라 뛰기도 했다.

외할머니 이름은 유공순이다. 외할아버지가 일찍 돌아가셔서 할머니 혼자 농사를 지으며 자녀들을 키우셨다. 어머니는 2 3 막내딸로 태어났다. 지금 생각하면 외할머니는 온유한 성품에 지혜로운 분이셨는데, 특히 음성이 부드러웠다. 나이 일곱, 여덟 살에 돌아가셨지만 아름답고 고상한 인격의 소유자로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다.

외삼촌네 아이들이 시끄럽게 떠들고 장난을 치면서 노는데도 외할머니는 번도 큰소리나 화를 내는 없이 인자한 목소리로 타이르곤 하셨다. 외할머니는 교육을 받지 못한 분이셨지만, 나는 어린 나이에도 그분의 고매한 인격에서 뿜어져 나오는 향기 같은 것을 느낄 있었다.

우리 어머니는 외할머니를 많이 닮으셨다. 외유내강이신 것과 총명하여 사리를 분별하는 재능을 가지신 것이 비슷했다. 평생 분노를 터뜨리거나 큰소리를 내시는 일이 없으셨다. 외할머니를 닮아서 이웃 사랑도 특별했다. 어머니는 마을에 있는 가난한 사람을 돌보셨다. 마디로 교양이 있는 분이셨다. 외할머니는 위로 딸을 농가로 시집보내고 나서 딸들이 고생하는 것이 애처로웠던지 막둥이 딸만이라도 도시 생활하기를 바라시는 마음에 정미소를 하는 집과 혼사를 맺으셨다.

당시 기독교에서는 혼인을 너무 일찍 하는 재래 습관을 제재하기로 해서, 여자 16, 남자는 18 이하의 결혼을 교회법으로 금하였다. 그러므로 우리 아버지와 어머니는 16 신부, 아버지는 18 신랑으로 기독교식 결혼식을 올리셨다.

기독교 가정이란 극히 보기 드문 시대였다. 우리 집은 할아버지와 할머니 그리고 아들들과 며느리들이 모두 집에서 함께 사는 기독교인 대가족으로 축복 받은 가정이었다. 할아버지는 식구를 거느리고 평양 시내에서도 대동강과 모란봉이 가까운 창동 교회를 다니셨다. 나는 창동교회의 이인식 목사님의 주례로 유아세례를 받았다. 아마도 아버지는 유아세례 때부터 딸을 위해 ‘기독교 선생’을 만들겠다는 꿈을 꾸어온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것이 유언으로 남겨질 줄은 아버지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한글을 깨우친 어머니

어머니는 집에서 10 넘게 떨어진 건산(乾山)교회에 친구들과 함께 것이 계기가 되어 어머니의 평생을 인도하시는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찬송가를 부르고 말씀을 듣는 것뿐만 아니라, 학교라고는 구경도 못한 어린 소녀에게 교회에서의 모든 경험은 놀라운 일이었다.

교회에서는 한글반이 있어서 성경을 읽을 있도록 가르쳐 주었다. 연필이나 적을만한 종이가 필요했지만, 어머니는 살림을 맡은 오빠에게 달라는 말을 차마 수가 없어, 가을에 창호지를 모았다가 오빠가 쓰던 연필 조각을 얻어 글을 쓰곤 했다.

내가 YMCA에서 ‘바른 실천 운동’ 위원장으로 캠페인을 벌이느라 전국 순회를 때였다. 어머니는 일을 기뻐하면서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셨다.

어느 새벽에 쌀가게 문을 여는데 문밖에 은전 50 짜리가 하얗게 떨어져 있더라는 것이다. 놀란 어머니는 많은 돈을 주어서 두어 떨어져 있는 파출소에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일본 순경이 놀라며 1 보관했다가 주인이 나타나지 않으면 도로 가져가라고 했다. 정말 1 후에 순경이 돈을 갖고 집에 찾아와서 돈을 도로 가지라고 했다.

이렇게 해서 돈으로 어머니는 당시 나이든 여성들이 저녁에 모여 초등학교 공부를 하는 ‘승현학교’에 다닐 수가 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흔쾌히 허락을 하셔서 어머니는 야학을 다니게 되었던 것이다. 어머니가 밤에 학교에 가야 했기 때문에 초등학교 1학년인 나는 어머니의 야학을 함께 따라 다녔다.

어머니는 그때 배운 한글로 성경을 읽고 편지도 써서 딸에게 보내기도 하셨다. 나에게 편지를 때마다 어머니는 ‘강연을 하거나 설교를 때는 주님의 십자가 사랑을 말하라’는 부탁을 하시곤 하셨다. 그것은 나에게 크고 귀중한 평생의 메시지로 남아 있다.

남편의 사랑

대가족인 데다가 정미소 집이라 일이 많고도 많았다. 16세에 시집 며느리로서 얼마나 감당하기 힘들었을까. 지금 시대 사람들은 상상할 수도 없을 것이다. 부엌일을 도맡아서 아니라, 추운 겨울 얼어붙은 대동강 얼음을 깨고 많은 식구들의 빨래를 해야 했다. 손이 고드름처럼 어는데 입김으로 녹여 보아도 어쩔 없이 굳어가는 상황에 손잔등은 터서 피가 보일 정도였다. 손으로 저녁이면 식구들의 양말을 기웠으니 쏟아지는 잠을 가눌 길이 없었을 것이다. 그래도 식구들이 건강하면 좋겠지만 시름시름 앓기 시작하는 집안 남정네들을 보면서, 특히 장대 같은 아버지가 병들어 눕게 되었을 때는 하늘이 무너지는 속으로 얼마나 기도하셨을까.

집안의 젊은 남자들이 하나 세상을 뜨는데 첫아이를 임신하게 어머니는 임신했다는 말도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고 한다. 아버지는 그래도 부모님 모르게 과일을 사다 주셨다고 한다. 어린 나이에 어른들에게는 어려워 마디도 못했지만 몰래몰래 사다 주는 남편의 과일이 그렇게도 위로가 되었던지 번이나 두고두고 나에게 이야기해 주었다.

할아버지는 아들들이 연이어 죽는 슬픔 속에 정미소를 팔고 집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평양의 중심거리인 대동문에서 보통문으로 가는 큰길에 가게를 마련해 쌀장사를 하셨다. 내가 초등학교 입학할 무렵 할아버지는 자리에 누우셨고, 1년을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손수 간병하셨다. 할아버지는 “내가 눈을 억지로 뻗치고라도 우리 선애 졸업하는 것을 봐야지. 하셨지만 6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곧이어 3 후에는 할머니가 자리에 누우셔서 화장실 출입을 못하셨지만, 어머니는 한마디 불평 없이 1 동안 할머니 시중을 드셨다.

할아버지 때와는 달리 살림이 어려워져 홀로 어머니가 생활비를 벌어야 하는 형편이어서, 고심 끝에 콩나물을 키워 팔기로 했다. 물동이를 10여개 사다가 안에서 콩나물을 키워 시장에 내다 팔았다. 할머니를 돌보며 밤중에 일어나 10여개나 되는 콩나물 동이에 물을 주느라 고생을 하셨다. 하지만 어머니는 원망이나 짜증이나 눈물을 보이는 일이 번도 없었다.

할머니의 새벽기도

5살쯤 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할머니는 아침 일찍 캄캄한 새벽에 가게 문을 열고 나를 깨워서 손목을 붙들고 조용하고 캄캄한 길을 걸어갔다. 어딘지 확실치 않았지만 모란봉인지 을밀대인지 깨끗하게 정리된 공원길을 올라가서 풀밭에 앉아 기도를 드리곤 했다. 풀밭에서 혼자 놀다가 할머니에게 다가와 보면 할머니는 눈물을 흘리시며 오랫동안 기도하시는 것이었다. 동이 훤하게 때는 할머니와 나는 깨끗이 청소된 길을 기분 좋게 걸어오면서 신선하고 행복한 느낌으로 집에 돌아오곤 했다.

나는 그때부터 새벽기도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지금까지 새벽기도만은 지켜야 하는 것으로 믿고 살았다. 후에 미국 유학을 때도 새벽기도 습관을 지키느라 애를 썼다. 내가 선전한 것도 아닌데 뉴욕성서신학교에 새벽기도가 확산되었다. 새벽기도가 기도운동으로 번지게 되었다.

할머니는 아들 5형제를 잃어버린 아픈 마음을 주님과 교제함으로써 그리고 성경 말씀으로 위로를 받으며 살았다. 한글을 늦게 배워서인지 읽으셔서 내가 가르쳐 드리기도 했다. 아마도 내가 유치원에서 한글을 익혀서 할머니에게 알려드린 같다. 할머니는 너무 기뻐서 “우리 선애는 신통해! 신동이야!”라고 하시며 예뻐해 주시곤 했다.

할머니의 기도 내용이 무엇이었는지 나는 알지 못한다. 언젠가 친구 중에 누군가가 어머니에게 “우리 선생은 가는 곳마다 사람이 따르고 칭찬을 받고 사랑을 많이 받는데 이상해요. 그렇지요?”라고 묻는 것이다. 그때 어머니가 처음으로 말씀해 주셨다. 할머니의 기도 덕분이라는 것이었다. 할머니는 이렇게 기도하셨다고 한다. “우리 선애는 불쌍한 아이입니다. 아버지도 없고, 형제도 없고, 삼촌이나 사촌도 없습니다. 외로운 아이입니다. 모쪼록 하나님께서 아이가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을 받으며 살게 해주십시오.

 

주선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