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늘귀를 통과하는 낙타

수도복 단추가 떨어져서 단추를 달려고 바늘에 실을 끼어 넣는데, 눈이 침침해서 잘 들어가질 않는다. 실에 침을 바르기도 하고 안경을 벗고 몇 번을 시도했는데도 바늘귀가 워낙 적어서 쉽지가 않다. 자정이 넘은 겨울밤 찬바람에 창문도 덜컹거리고 손도 바르르 떨린다. 옆 수실에 계신 강수사님께 부탁해 볼까 하는 생각도 하지만, 너무 늦은 밤이라 부를 수도 없다. 몇 번 포기하려다 봉사가 문고리를 잡듯이 간신히 바늘귀에 실을 끼어 넣었다.

어릴 적 어머니가 눈이 어두워서 바늘귀가 안 보인다고 하시면 엄마, 내가 할께.”라면서 일곱 형제들이 서로 하겠다고 실랑이를 벌이다가 바늘에 실을 꿰어드렸다. 그러면 어머니는 떨어진 양말이나 불에 태워 먹은 잠바를 꿰매주면서 밤늦게까지 옛날이야기도 해 주시고, 속옷을 벗겨 보리쌀만한 이도 잡아주시고, 공부도 가르쳐 주셨다. 화롯불에 고구마를 구워 동치미와 먹곤 했었다.

검은 천 이불에 아홉 식구가 도란도란 살던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서 수도복 단추를 꿰매었다. 실이 다 떨어져 바늘귀에 실을 넣어야 하는데, 좀 전보다 더 어렵다. 순간 푸념을 늘어놓았다. “주님, 제 눈을 밝혀주시던지 바늘귀를 크게 해주시던지 해야지 이 한밤중에 어쩌란 말입니까.” 그때였다. 주님께서 약대가 바늘귀로 들어가는 것이 부자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쉬우니라”(19:24)라고 하신 말씀이 번개처럼 떠올랐다.

그 큰 낙타가 이 작은 바늘귀를 어떻게 통과할 수 있을까? 어떻게 그것이 가능한 것일까? 실제로 바늘귀는 이스라엘의 성문 곁에 있는 허리를 굽히고 들어갈 수 있는 아주 작은 좁은 문을 비유로 하신 말씀이라고 한다.

유대민족들은 유목민 생활을 하면서 많이 살고 있다. 자주 장막을 옮겨 이사를 하는데, 그 천막집을 짓기 위해서는 바늘과 실이 꼭 필요하다. 그러나 광야에서 천막을 깁는 튼튼한 실을 구한다는 것을 거의 불가능하다. 그래서 여러 가지 방법을 간구해보다가 한 가지 방안을 고안하였다. 먼저 큰 가마솥의 밑바닥을 바늘귀와 같은 20개 정도의 아주 작은 구멍들을 뚫는다. 그리고 밑바닥을 진흙으로 바르고 아궁이에 올려놓는다. 그런 다음 그 속에 올리브기름 삼분의 일과 물 삼분의 일을 넣고, 300도 이상 되는 열기로 펄펄 끓인다.

솥 주위에는 약 1미터 정도의 도랑을 파서 차가운 물이 흐르게 한다. 이렇게 준비가 다 끝났을 때에 벗긴 낙타의 가죽은 천막을 만드는 재료로 쓰이고, 몸체는 가마솥 속에 집어넣는다. 낙타가 가마솥에서 완전히 녹아 흔적도 없어질 때까지 뜨거운 열을 가한다. 완전하게 고아진 것을 확인하고 가마솥 밑에 있는 진흙을 뜯어내면, 그 작은 구멍으로 하얀 실 같은 것이 멈추지 않고 흘러나와 도랑에 준비되어 있는 물로 떨어진다. 실이 식으면, 타래에 실을 감아서 천막을 기울 때에 사용을 한다. 그 당시에는 낙타로 만든 실만큼 질긴 실은 없었다고 한다.

마태복음 19장의 말씀은 모든 소유를 다 버려야 한다는 데 초점이 있다. 그러나 부자 청년은 예수님을 따르려다가 소유를 다 팔아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주라는 말씀에, 근심하면서 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예수님께서는 천국에 들어가려면 외적인 소유뿐만 아니라 내적인 소유를 다 팔아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다시 말해서 세장적이고 마귀적이고 육신적인(죄성과 정욕과 결점들) 것들을 광야연단을 받으면서 다 팔아야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곧 자신이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기도 하다. 낙타가 녹아서 실이 돼야 바늘귀로 들어가듯, 우리의 자아가 다 녹아지고 깨어져서 완전히 무가 될 때 비로소 천국에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부자가 천국 가는 것이 낙타가 바늘귀로 통과하기 보다 더 어렵다고 하신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는 뜻이 아니다. 소유를 다 팔면 들어갈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찾는 넓은 문이 아니라, 좁은 문을 거쳐 좁은 길로 들어가야 한다. 이는 반드시 버릴 건 버리고, 팔건 팔고, 포기할 건 다 포기해야만 들어갈 수 있는 것이다. 옛사람, 겉 사람, 자아, 자기라는 불순물을 세 차례의 광야연단과정을 통하여 다 제거하고 마음과 행실이 정결하게 되었을 때,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주합일되어 신의 성품에 참예(벧후1:4)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가지고 있는 소유는 무엇인가? , 명예, 권세, 쾌락, 가정, 교회, 지식 등 그 어떤 외적 소유보다도 주님을 더 사랑하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합당치 않다. 더 중요한 것은 내적소유들을 철저히 녹여 없애야 한다. 녹아진 낙타의 희생을 통하여 천막을 만들 듯이, 주님께서는 자신의 몸을 십자가에 산 제물로 드려 속죄제물이 되시어 우리들이 거할 영원한 장막을 준비해주셨다. 그 큰 사랑과 희생으로 말미암아 너와 나, 우리를 살리셨다. 그 희생의 대가로 말미암아 죄로 막힌 담을 허물어 버리시고, 우리에게 천국의 길을 활짝 열어놓으셨다.

이 세상의 것들을 움켜쥐고서는 천국에 결코 들어갈 수가 없다. 세상의 재리는 우리를 염려와 근심의 노예로 전락시켜 버리고 천국 문에 이를 수 없게 하는 것이다. 천국을 향해 달려가는 광야 인생들이여, 정신을 차리고 깨어 근신해야 한다. 넓은 문으로 기웃거리지 말고 천국 문에 다다르는 좁은 문 좁은 길로 나아가야 한다.

쓰레기로 가득 찬 시커먼 보자기를 바리바리 끌어안고 히죽거리며 돌아다니는 정신병자처럼, 세상 것 끌어안고 살다가 지옥문 앞에서 아차, 내가 이 더러운 쓰레기 더미를 끌어안고 있었구나!’라며 후회한들 무슨 소용 있으랴. 세상의 보따리 잔뜩 끌어안고 어떻게 좁은 문을 통과할 수 있으랴. 좁은 문을 지나 좁은 길로 가려면 이 등짐을 다 내려놓아야 한다. 펄펄 끓는 가마솥으로 들어가야 한다. 다른 길이 없다. 정욕으로 어두워진 눈으로는 결코 바늘귀로 들어갈 수 없다.

겨울바람에 파르르 떨리는 문풍지 마냥 파르르 떨고 있는 죄 많은 이 늙은 수도사도 주님 앞에서 갈 길이 멀다. 엄동설한 추운 겨울밤, 바늘 구멍만한 작은 눈으로 주님을 어설프게 바라보고 있는 가련한 내 영혼. 이 육신의 가죽을 어서 속히 다 벗어버리기 위해 펄펄 끓는 가마솥에 과감하게 뛰어들지 못하고 머뭇거리며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고 있는 내 영혼. 이 질긴 목숨을 우두커니 끌어안고 땅만 보며 살아간들 무엇 하랴. 참회의 눈물로 어두운 눈 환히 밝혀, 이 길이 아무리 좁고 협착한 바늘귀와 같은 좁은 길일지라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온 몸이 녹아내리는 아픔을 치루더라도 천국의 장막을 완성하는 그날까지 더러운 나의 심령을 맑은 물에 씻고 또 씻어내야 한다. 낙타처럼 기도의 무릎을 꿇고 이 긴 사막을 지나가서 저 천국에 이르는 그날까지 소유를 팔고 또 팔아 생명을 얻기까지 쉼 없이 달려가야 한다.

박희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