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희가 남기고 간 향기

어느 여름 날, 청년회에서 화천 산골짜기에 있는 기도원으로 철야예배를 간다는 소식을 듣고 철희는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일기로 인하여 취소되었다는 소식에 실망과 아쉬움을 가진 채 잠자리에 들었는데, 꿈을 꾸게 되었다. 하얀 옷을 입으신 할아버지 한분이 한 손엔 큰 산삼을, 다른 한 손엔 큰 성경책을 들고 청년회에서 가기로 한 그 기도원 앞에서 그를 반겨주시며 이곳에서 머물며 이곳을 지켜 달라고 하는 내용이었다.

그러자 혼자서라도 그 기도원을 가기로 작정한 철희는 친구와 함께 그곳을 찾아 갔다. 그 기도원은 지금은 형체만 남아 있지만, 화천공동체로부터 20여분 상류 쪽에 있는 곳이었다. 그 당시 그 기도원은 인근 시골 교회의 기도원으로 사용하던 곳이었는데, 얼마 후 교회에 어려움이 있어 돌보지 못하게 되었다. 그곳에 도착한 철희는 장소와 건물 등을 보며 깜짝 놀랐다고 하였다. 전날 꿈속에 보았던 모습 그대로의 골짜기 풍경과 건물모습이었기 때문이었다. 친구가 떠난 후 며칠을 그곳에 더 머물면서 그는 결심을 하였다. “꿈속에 나타나신 분이 그래서 이곳을 지켜달라고 하셨구나. 내가 하나님의 기도의 집인 이곳을 기도하며 지켜야겠다.”

그 후 철희는 다시 짐을 챙겨 와서 그곳에 머물며 홀로 기도하며 그 골짜기에서 생활하였다. 그야말로 독수도가 시작되었다. 더덕을 캐고 개울가에서 물고기와 다슬기를 잡아먹으며, 산나물과 약초뿌리 등을 캐어 장에 내다 팔았다. 한때 기도원으로 사용되었던 이곳을 지킨다는 사명감으로 그는 육신적으로 여러 가지 힘들고 고달프고 외로울 때도 있었지만, 홀로 기도하며 주님과 만나는 시간들이 너무 즐거웠다고 하였다.

그렇게 여러 해가 흘렀다. 그런데 그 건물과 터에 욕심이 난, 가까운 곳에 살고 있었던 통일교에 관련된 어느 모자의 모함으로 인하여 그는 감옥 생활을 하게 되었다. 모함이 풀려서 감옥은 나왔지만 결국 법적인 절차로 인하여 그 기도원에서 쫓겨 나와 예수원 공동체를 찾아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따뜻한 환영을 받으며 오랜 날들을 그곳 식구가 되어 함께 공동체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후 화천 골짜기 기도원이 궁금하여 휴가를 얻어 다시 찾아왔는데, 이미 그 기도원은 폐허가 되어 있었고, 쓸 만한 가구와 가재도구들은 거의 없어진 상태였다. 가슴을 쓸어내리며 발길을 돌리는데, 그곳 근처에서 기도원을 새롭게 시작한 나의 작은 누님 가족을 만나게 되었다. 당시 작은 매형은 강도사님으로 기도원에 뜻을 가지고 여러 곳을 찾아다니며 물색 하던 중 철희가 떠난 후 그곳 골짜기 입구쯤에 기도원 텃밭을 일구고 있었다. 나중에 안산이 개발될 시 교회 개척의 뜻을 가지고 나가시고, 이곳에서 나는 아바 공동체를 시작하게 된 것이었다.

며칠 철희가 그 기도원에 머물고 있을 동안에 마침 방문을 했던 나는 처음 그를 보게 되었다. 그때 그를 통해 예수원 이야기를 들으며 흥분이 되었다. 당시 공동체에 모든 관심이 있었던 터이고 또 일찍이 막내 동생을 통해 들었던 예수원에서 생활했던 사람을 보게 되자 너무 기뻤다. 결국 그를 따라 예수원을 방문하게 되었다.

그곳은 깊은 산속에 감추어진 영성의 샘터 같았다. 침묵을 통해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고, 그 사랑으로 세상을 품고 중보 하는 곳이었다. 무엇보다도 토레이 신부님과의 면담 시간이 너무나 감사했고 좋았다. 특별히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나는 것은 먼저 미국에 가서 공부를 다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서 공동체를 하려한다는 계획을 말씀드렸다.

그러자 “아마 공부하고 돌아오면 화천 산속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공동체 비전이 하나님으로부터 오신 것으로 확인이 되었으면 바로 순종하세요. 공부 너무 많이 하지 마세요. 한국 목사님들 공부병 들었어요. 목사님 하는데 신학교 공부 이미 충분해요, 박사학위 필요 없어요. 다 써먹지도 않을 공부로 인하여 시간을 낭비 하고 있어요. 그 시간에 양 돌보고 목회해야 해요.”라고 조용히 권면을 하시는 것이었다. “네, 알겠습니다.”라고 대답을 드리자 나의 손을 꼭 잡아 주시며 환한 미소로 격려해 주시던 그 분의 모습은 지금도 큰 힘과 도전이 되곤 한다. 지식이 아닌 삶과 희생을 통하여 공동체를 이루기 위한 하나님의 마음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 후 몇 달 뒤 화천에 공동체 텃밭을 일구기 시작 했을 때, 예수원의 토레이 신부님으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게 되었다.

“사랑하는 윤식 형제님, 아바 공동체를 시작했다는 것 알게 되었습니다. 축복하고 격려합니다. 다름 아니라 철희 형제를 아바 공동체의 가족으로 받아들여 주시면 고맙겠습니다. 요즈음 이곳 예수원에는 젊은 부부들이 많다보니 임산부들도 많은데, 철희 형제가 자주 간질을 하게 되어 산모들이 좀 놀라고 철희 형제도 그곳으로 돌아가서 그 골짜기를 지켜야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곳 우리 예수원 공동회에서 먼저 편지를 드리게 된 것입니다.”

그 후 예수원으로부터 일주일 안에 철희가 아바 공동체에 도착 될 것이라는 연락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이주가 지나도 그는 오지 않았고, 예수원에 문의 해본 결과 예정대로 떠났다는 것이었다. 모두가 노심초사하고 있는데 한 달이 막 지날 즈음, 황혼쯤에 그가 보따리를 들고 터벅터벅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날부터 “내 진정 사모하는 친구가 되시는 주 예수 나의 좋은 친구라”는 찬양이 그가 떠나는 날까지 매일매일 이곳에 울려 퍼지기 시작하였다.

그렇게 철희와 함께 봄은 왔고 우리는 봄맞이로 다시 녹아 물이 흐르는 골짜기로부터 식수를 끌어오는 작업과 밭을 갈고 파종하는 작업을 해야 했다. 500미터 길이의 호수 연결과 파종할 씨와 비료 등을 준비해야 했다. 그 비용이 필요했기에 함께 기도해오던 어느 날 강단에 저금통장과 도장이 있었다. 일주일 만에 오겠다던 철희가 왜 한 달 뒤에야 왔는지 알게 한 통장이었다.

“어떻게 빈손으로 와요. 그래서 한 달 간 원주 어느 목공소에서 잔심부름 해주고 필요한 것 쓰고 이렇게 가져왔는데, 이것이 지금 필요할 것 같아서 내놓습니다. 적은 것이지만 사용해주세요.”

그 통장의 금액은 호수와 씨앗, 모종 거름 기초 농기구등을 사는데 딱 맞았다. 실로 오병이어의 통장이었다. 한 소년이 드렸던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처럼 거기에는 진정한 나눔이, 참된 기쁨을 나누는 사랑이 있었다. 그 곳엔 세상의 가치로 매길 수 없는 놀라운 힘이 있었다. 작지만 소중한 전부를 드렸던 그의 희생에 감격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작은 희생을 통하여 호수를 연결하여 식수와 씨앗과 모종으로 양식을 공급받게 되었다. 철희는 진정한 나눔과 희생과 사랑이 무엇인지 삶을 통하여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간, 작은 천사였다.

이윤식